지구 생물체는 항복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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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정보라 작가의 자전적 SF 연작소설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포항 자택 집필실에서 포즈를 취한 정보라 작가. 이정용 <한겨레>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2년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를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평했다. 보르헤스, 마르케스, 사라마구의 계보에 정 작가를 놓은 것이다. 2024년 1월 세상에 나온 연작소설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래빗홀 펴냄)에서 ‘마술적’이란 수식어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 ‘정보라 월드’는 지독한 리얼리스트의 세계다.



2020년 정 작가는 한국비정규교수노조 조합원으로 투쟁하다 팬데믹이 한창일 때 결혼하고 이듬해 경북 포항으로 이주했다. 그 뒤 자전적 실화에 바탕을 둔 ‘해양생물 연작’(문어·대게·상어·개복치·해파리·고래) 6편을 완성했다. 새로 사랑하게 된 사람들과 바다를 가운데 둔 연작 속에서 현실과 비현실, 작가 특유의 능청과 진지함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이야기의 문을 여는 ‘문어’는 강사법 개정과 비정규직 강사 대량 해고 사태를 배경으로 했다. 대학에서 장기 농성 중인 어느 날, 느닷없이 본관에 나타난 문어가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고 겁박한다. 잠이 덜 깬 ‘해산물 러버’ 비정규교수노조 위원장은 자연스럽게 문어를 잡아 해장 라면을 만들어 먹는다. 강사였던 ‘나’는 결국 잘리고 위원장을 ‘남편’으로 맞아 함께 투쟁하는 삶을 선택한다.

‘대게’ 편에 등장하는 대게 예브게니는 ‘나’에게 말을 건다. 자신은 러시아 해양가스관 건설 현장에 동원돼 착취당했다며 울분을 토하고 다리까지 부들부들 떤다. 시어머니는 “(쟈) 쏘주라도 한 잔 줘야 되는 거 아이가?”라고 동정하고 남편은 대게에게 노조를 만들어 단결하라고 진지하게 조언한다.

냉동 돔배기(소금에 절인 상어고기) 사기꾼이 등장하는 ‘상어’ 편에서는 남편의 암 재발과 시어머니의 입원, 돌봄 이야기가 자세히 그려진다. 살벌한 팬데믹 시대의 병원 풍경과 권력층이 연루된 100억원대 ‘가짜 수산업자’ 사건이 엇갈린다. ‘개복치’ ‘해파리’ ‘고래’ 편에 이르면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 비정규직 노동자를 착취하는 글로벌 자본과 이를 방치하는 정부, 해양생태계 파괴 이야기가 서로 얽혀든다. 시치미 뚝 뗀 직설과 쫄깃한 수다 속에 외계 생물체의 정체가 드러나고, 서사는 생명체의 삶과 죽음이라는 커다란 목적지로 장엄하게 흘러간다. ‘나’와 ‘남편’은 각종 해양동물과 접속하고 서로 침투하면서 함께 싸워나간다.

‘열받으니까’ 글을 쓴다는 작가는 말한다. “항복하면 죽는다. 우리는 다 같이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데모하고, 연대하고, 살며 사랑하는 이야기다. 존엄하고 자유롭게 생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저항이고 저항이 곧 사랑임을 뜨겁게 증명한다.

21이 찜한 새 책



본 헌터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2만원

한평생 뼈의 증언을 들어온 집념의 인류학자 선주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사건에 휘말린 불명의 유골. 70여 년 세월을 뛰어넘어 이들이 입을 연다. “나, A4-5는 누구인가. 왜 여기에 묻혀 있는가.” 베트남전쟁기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을 좇아온 고경태가 국가폭력 피해자의 상흔을 심도 깊게 들여다봤다. 픽션보다 더 드라마틱한 논픽션.



뒷자리

희정 지음, 포도밭출판사 펴냄, 1만6천원

기록노동자 희정이 ‘싸움의 뒷자리’를 기록했다. “올해까지만 싸우겠다고 했으면서, 이듬해에도 또 다음해에도 피켓이든 뭐든 들고 나타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썼다. 싸움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흔적, 지워진 발자국 같은 이야기다. 밀양, 매향리, 롯데호텔, 114 한국통신 안내원 투쟁의 흔적과 ‘그림자 노동자’의 목소리.



모두가 가면을 벗는다면

데번 프라이스 지음, 신소희 옮김, 디플롯 펴냄, 2만2천원

‘과하다’ ‘지나치다’ ‘비정상이다’라는 말에 치이고 휘둘리는 모든 사람을 위한 책. 사회심리학자, 작가, 활동가, 교수이자 트랜스젠더 자폐인인 저자가 신경다양인(자폐·ADHD·양극성 성격장애 등)을 말한다. 자폐 정체성, 트랜스젠더 정체성, 가면 자폐증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정상성의 가면을 벗는 과정 등을 탐구했다.



형식과 영향력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서제인 옮김, 에트르 펴냄, 1만9천원

<불안의 변이>(봄날의책 펴냄)를 쓴 소설가이자 번역가 리디아 데이비스의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 대부분 저자가 60대 이후에 쓴 글로, 자신이 매혹됐던 형식과 영향받았던 자료를 소개하는 ‘문학적 자서전’이다. 똑같은 말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일, 어색한 산문의 아름다움, 좋은 글쓰기 습관을 위한 조언 등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