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인상과 정년 연장, 국민투표 부친 나라 [평범한 이웃,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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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생·고령화로 인구구조가 급변하면서 연금제도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노령층의 복지 수준이 높은 스위스도 예외가 아니다. 3월3일 연금 관련 두 가지 국민투표의 귀추가 주목된다.
2015년 8월24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한 노부부가 젝세로이텐 광장 위를 걸어가고 있다.©EPA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문미순 작가의 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13평 임대아파트에서 노모와 함께 사는 50대 여성 명주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명주는 이혼 후 급식 조리원으로 일하던 중 물이 끓는 솥이 떨어지는 사고로 발바닥에 큰 화상을 입었다. 상처가 아문 뒤에도 통증이 심해 선 채로는 일을 할 수 없게 됐지만 통증의 원인이 규명되지 않아 의사에게 ‘근로능력 불가’ 평가를 받지 못했고 따라서 기초수급자 신청도 할 수 없었다. “가난을 증명하는 것도 어렵고 수치스러운 일인데, 몸이 아프다는 걸 증명하는 건 더 복잡하고 굴욕적이었다.” 명주는 결국 치매 걸린 엄마의 집으로 들어가 엄마 앞으로 나오는 연금에 생계를 의탁한다.

엄마라 해도 섬망에 시달리며 욕설을 뱉고 폭력을 쓰는 76세 치매 노인의 수발을 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엄마가 밥상을 엎었던 어느 날, 명주는 집을 나와 노래방에서 목 터지게 노래를 부르고 늦게까지 밤거리를 쏘다닌다. 자정 넘어 돌아간 집에서 명주가 발견한 것은 바닥에 엎어진 채 숨을 쉬지 않는 엄마의 몸이었다. 죄책감과 두려움에 자살 시도를 하지만 하루 반나절 뒤 깨어난 명주는 엄마의 휴대전화로 온 문자메시지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든다. 연금 입금 문자였다. 기초연금과 유족연금을 합한 금액 100만6860원. “엄마가 남겨준 풍요와 여유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명주는, 연금을 계속 받기 위해 엄마의 사망 사실을 숨기고 시신을 미라로 만든다.

이 작품에서 연금은 명주가 포기할 뻔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동아줄이다. 사체 유기와 연금 부정 수령을 저지른 범법자이자 죽은 엄마의 시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막은 패륜아라는 죄책감에 가슴이 무겁지만, 명주는 그것이 시어머니와 남편을 위해 다섯 종류의 김치를 담그며 살고도 위자료 한 푼 받지 못하고 끝난 결혼 생활이나, 죽도록 일하다 다쳐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던 직장 생활의 한을 달래주는 것이라 여겼다. 비록 자신 앞으로 내려온 동아줄도 아니고 대단히 튼튼한 동아줄도 아니지만, 명주는 일단 그 줄을 붙잡고 계속 살아보기로 한다. 연금이란 그런 것이다. 운이 좋은 누군가에겐 별 의미 없는 추가 소득이지만 누군가에겐 그것에 의지해야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동아줄. 전자는 소수이고 후자가 다수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가 연금이라는 사회보장제도를 갖추고 있다.

문제는 저출생·고령화로 인구구조가 급변하면서 지금까지 그럭저럭 작동해온 연금제도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인구구조 변화가 한국보다 훨씬 덜하고 경제적으로 안정된 스위스도 예외가 아니다. 물가상승분을 따르지 못하는 연금 액수, 연금기금 고갈 등의 문제로 고민해온 스위스인들은 오는 3월3일 연금 관련 두 가지 안건을 놓고 국민투표를 한다. 첫 번째 안건의 명칭은 ‘더 나은 노년의 삶을 위해-13번째 국민연금’이다. 연금을 1년에 열두 번이 아니라 열세 번 지급하라는, 즉 연금 액수를 12분의 1(8.3%)만큼 인상하라는 내용이다. 두 번째 안건의 명칭은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노후 대비를 위해’로, 현재 65세인 정년을 66세로 늘리고 그 이후에도 기대수명 증가에 따라 정년을 자동 연장하자는 내용이다. 두 안건 모두 노후 대비를 내세우지만 전혀 다른 대책을 제시한다. 하나는 연금을 더 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을 더 오래 하자는 것이다.

두 가지 국민투표의 세부 내용을 짚어보기에 앞서, 우선 스위스 연금제도의 기본적 내용부터 짚고 넘어가자. 스위스는 국제 노인 인권단체 헬프에이지인터내셔널이 발표한 세계노인복지지표(2015)에서 96개국 중 1위(한국은 60위)를 차지할 만큼 노령층의 복지 수준이 높다. 여기에 한몫하는 것이 ‘세 개의 기둥(three pillars)’이라 불리는 스위스 연금제도다. 기둥 세 개가 국민의 노후 복지라는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는 뜻에서 그런 별칭이 붙었다.

2019년 10월20일 스위스 취리히의 한 투표소에서 자원봉사자들이 투표함을 쏟고 있다.©AP Photo


첫 번째 기둥은 아하파우(AHV, Alters-und Hinterlassenenversicherung)라고 불리는 노령 및 유족연금, 그리고 장애연금이다. 한국의 국민연금에 해당하는 이 연금은 스위스 거주자라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소득이 있는 17세 이상, 소득이 없더라도 20세 이후부터 납입한다. 납입금은 소득이나 재정 상태에 따라 달라지지만 직장인의 경우 대략 급여의 5% 선이다. ‘은퇴 후 최저생계 보장’이 첫 번째 기둥의 목적인데, 연금 액수는 1인당 매달 최저 1225스위스프랑(약 189만원)에서 최대 2450스위스프랑(약 378만원)이다. 최저 생계 보장 비용이 너무 높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스위스가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높은 곳임을 고려해야 한다. 사정상 납입을 못해 연금을 못 받는 가입자들에게는 보충급여제도를 통해 최저 생계를 보장해준다.

젊은 세대를 희생양 삼는 일?



두 번째 기둥은 퇴직연금이다. 연간 소득이 일정 금액 이상 되는 모든 임금노동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급여에서 납입하는 비율을 4.5%, 6.5%, 8.5% 중 선택할 수 있다. 노동자와 같은 금액을 고용주가 부담해 적립하고, 자영업자는 자발적으로 가입할 수 있다. 두 번째 기둥의 목적은 최저 생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노년에도 ‘은퇴 이전과 비슷한 생활 수준’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직업을 갖고 정년까지 쉬지 않고 일했을 경우, 첫 번째 기둥과 두 번째 기둥에 의해 은퇴 직전 소득의 약 60%가 연금으로 보장된다. 세 번째 기둥은 그 외에 추가 소득을 원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선택해 가입하는 연금이다. 정부가 이 연금에 세제 혜택을 제공하지만, 연간 납입 상한선(약 7000스위스프랑, 약 1000만원)이 있다. 즉, 스위스 사회의 노후 복지는 정부·직장·개인 세 기둥에 의해 세워진다.

다가오는 두 건의 국민투표에서 다루는 연금제도는 그 세 가지 기둥 중 첫 번째 기둥, 즉 AHV다. 다른 많은 국가들에서처럼 스위스도 이 연금은 난관을 맞고 있다. 자기가 낸 돈을 나중에 돌려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인구가 기여금을 납부해 은퇴한 노령층의 연금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 즉 ‘세대 간 계약’ 방식 때문이다. 출생률은 떨어지는데 기대수명은 늘어나니 납입금과 연금 지불액 사이의 균형이 무너진다. 살 날이 많이 남은 노령층은 현재의 연금액이 부족하다 하고, 젊은이들은 꼬박꼬박 납입해도 수십 년 뒤 연금이 제대로 나올지 불안해한다.

우선 연금액을 8.3% 인상하자는 내용의 ‘13번째 연금’ 국민투표 안건을 보자. 현재 스위스 인구는 약 880만명이고 그중 250만명 이상이 AHV 수급자다. 안건이 통과하면 이들에 대한 연금 지급액으로 연간 약 40억 스위스프랑(약 6조원) 넘게 더 필요하다고 정부는 추산한다. 지지자들은 집세, 보험료, 물가 등이 너무 올라 AHV가 기초생활 보장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연금기금이 충분한데도 정부가 비관적으로 문제를 부풀린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반대자들은 기금이 계속 고갈돼 2050년께 1000억 스위스프랑(약 154조원) 적자가 날 것이라는 전망에 집중한다. 연금액 인상은 현재의 젊은 세대를 희생양 삼는 일이라는 뜻이다. 스위스 정부, 의회, 그리고 많은 전문가들이 이 안건에 반대하고 있지만 실제 여론은 찬성 쪽으로 크게 기울어 있다. 1월 중순 스위스 미디어그룹 타미디어(Tamedia)가 시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71%가 13번째 연금 안건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안건인 ‘정년 연장’ 국민투표는 급진자유당 청년당이 제안한 것으로, 기금 고갈을 막기 위해 연금 수급 시기를 늦추려는 게 목적이다. 2033년까지 단계적으로 현 65세인 정년을 66세로 연장하고, 이후 기대수명 증가분의 80%만큼 정년을 자동으로 연장하자는 내용이다. 즉 기대수명이 1개월 늘면 정년은 0.8개월 연장된다. 정년은 스위스에서 최근 몇 년간 꾸준히 도마 위에 올랐다. 원래 여성의 정년은 남성보다 1년 이른 64세였으나 2022년 9월 국민투표를 거쳐 남성과 같은 65세로 바뀌었다. 새 정년이 시행된 게 올해 1월인데, 두 달 만에 다시 66세 정년을 투표에 부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실패일까, 공동체의 실패일까



지지자들은 정년을 66세로 연장함으로써 2030년까지 연금기금 20억 스위스프랑(약 3조원)을 절약할 수 있고 고갈 시기도 늦출 수 있다고 말한다. 반대자들은 정년 연장이 미봉책일 뿐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추가 재원 마련 등 다른 대책을 찾아야 하는데 정년 연장이 문제의 심각성을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민의 기대수명과 정년을 자동 연동하는 방식은 경제나 노동시장의 발전을 고려하지 않은 경직된 메커니즘이라 위험하다는 지적도 많다. 수명은 외국인 이민자 유입이나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등 여러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 스위스 내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기대수명에 따른 정년 자동 연장을 시행 중인 국가는 포르투갈(정년 66세 4개월)과 이탈리아(정년 67세)뿐인데, 환경이 다르고 시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효과를 단정짓기는 이르다.

2022년 9월23일 스위스 제네바 거리에 여성의 정년 연장 반대 포스터가 놓여 있다. ©AFP PHOTO


지난 몇 년간 스위스에서 연금 개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이만큼이나 치열한 정치적 과제도 없는 듯하다. 연금은 어느 나라에서나 복잡한 문제지만, 스위스에서는 국민투표라는 산을 하나 더 넘어야 한다. 정년 연장이나 남녀 정년 통일 등에서 스위스가 유럽 다른 국가들에 비해 한발 늦은 주된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다. 정부에서 다 합의된 내용이 마지막에 국민투표로 넘겨져 원점으로 돌아가곤 했다. 여성 정년 연장은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2022년 통과하기 전까지 두 차례(2004년, 2017년)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미디어의 책임도 돌아볼 일이다. 정치인들이 특정 유권자에게 집중하듯이, 미디어도 이용자 다수를 차지하는 특정 계층의 입맛에 맞는 보도를 한다. 당장 받을 수 있는 연금 액수를 내세우거나 비관적 미래를 강조함으로써 공동체적 해결보다는 세대 간 갈등으로 프레이밍한다. 스위스 일간 〈NZZ〉은 미디어의 이런 행태를 지적하며 “아첨은 모욕의 가장 예술적인 형태이지만 미디어는 이용자가 이를 알아채지 못할 거라 기대한다”라는 자기비판적 쓴소리를 했다.

확실한 건 현재의 제도가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다. 남은 삶은 길어지고 물가는 오르는데 그것을 감당할 재원이 없다. 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추천사에서 평론가 박혜진은 이렇게 묻는다. “각자 열심히 산 대가가 불행의 거미줄에 포박당한 채 범법자가 되거나 패륜아가 되는 일뿐이라면 그것은 그들의 실패일까 공동체의 실패일까.” 스위스 유권자들이 이 겨울을 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