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기획] 누구나 여는 공동출입문...‘외부 침입에 무방비 노출된 주택’

입력
'25438', '종 1234', 'Pass 4321', '종 0698', '0568', '1130 1103'. 입주민들만 알아야 할 다세대 주택의 공동현관 비밀번호가 인터폰 주변에 쓰여 있어 주민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서예원 기자


공동현관의 키패드 옆면에 '1426'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그럼 저도 이제 아무 집이나 들어갈 수 있는 거잖아요"

다세대·다가구 주택, 원룸, 고시원 등에 보안을 높이기 위해 설치된 공동현관의 잠금장치. 평소 의식하지 않고 지나치던 공동현관 키패드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문틈 실리콘 위, 유리창 모서리, 키패드 옆면 등에서 조그만 숫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25438', '종 1234', 'Pass 4321', '종 0698', '0568', '1130 1103'. 적힌 번호를 잠금장치에 그대로 입력하니 공동현관 문이 활짝 열렸다.

주거시설의 '1차 범죄 예방 방어선'인 공동현관 잠금장치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현관 문틈 실리콘 위에 적힌 '1514'


"여기 거주하시나요? 공동현관 비밀번호가 '1514' 맞죠?"

다세대 주택가에서 만난 시민들은 대화 도중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 신림동 빌라에 거주하는 한 여성은 취재진이 비밀번호가 버젓이 적힌 현관을 가리키자 "살면서 (공동현관 비밀번호가) 떡하니 적혀있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다. 그럼 저도 아무 집이나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당혹스러워 했다.

택배 기사가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있다. 키패드 위에 '98 56'이라고 적힌 숫자를 찾아볼 수 있다.


거주민들은 대부분 공동현관에 적혀있는 비밀번호가 택배나 음식 배달 기사들이 편의를 위해 작성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원룸에 거주하는 한 40대 여성은 "아마 택배 배달 기사들이 적었을 것 같다. 요즘에는 '새벽 배송'처럼 저녁에 주문해서 다음 날 아침 전에 택배를 배송하는 경우들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지 않겠냐"면서 "밤에 서비스를 편리하게 이용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같은 원룸에 거주하는 20대 여성은 "조금 편리하자고 개인정보나 안전까지 위협받는 건 원하지 않는다"며 "집 현관 비밀번호까지는 모른다고 해도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아무나 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안하다. 누구나 현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우리 집 앞에 있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노출된 비밀번호 위를 덧칠해서 흔적을 없앤 모습.


키패드 옆으로 시선을 돌리면 '5542'라고 적힌 낙서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더는 '비밀이 아니게 된 비밀번호'. 도대체 누가 적은 걸까?

서울 마포구 일대 택배 배송 업무를 하는 한 택배 기사는 "아마 택배 기사가 써놓은 것이 맞을 것이다"라면서 "배송 과정에서 물건도 많고, 벨을 눌러도 사람도 없고, 비밀번호도 알려주지 않는 상황들이 있다. 택배 기사가 본인이 자주 배송을 담당하는 건물에 일하기 편해지려고 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다른 택배 기사 역시 "예전에 배달할 때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하고 만나서 사인하는 과정이 있었다. 코로나 당시부터 비대면 배달이 권장되면서 배송 과정에서 변화가 있었다"며 "(모서리에 작게 적어놓은 비밀번호는) 배달 기사 본인은 알지만 관심 없는 사람은 모르게 하기 위한 방법일 것"이라고 답했다.

택배나 음식 배달 기사들이 빠른 배송을 위해 비밀번호를 현관 근처에 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택배나 배달 기사들의 편의를 위해 적힌 공동현관의 비밀번호지만 개인정보 유출이나 주거침입 등의 범죄에 악용될 우려가 있다.

마포구 빌라에 거주하는 30대 남성은 "비밀번호가 현관에 이미 적혀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했었다"면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거 침입 범죄의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걱정을 표했다.

노출된 비밀번호로 인해 빌라 거주민들이 쉽게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부산 기장군에서 40대 남성 A 씨는 공동현관 출입구 근처에 적힌 비밀번호를 활용해 원룸 건물 안으로 침입했다. A 씨는 택배 기사를 사칭하며 초인종을 누른 혐의로 특수강도예비, 야간주거침입절도 등이 적용돼 구속됐다.

또한 지난해 12월 오전 2시 30분께, 인천시 남동구 빌라에서 30대 남성 B 씨 역시 택배기사들이 공동현관 옆에 적어둔 비밀번호를 보고 건물 내부 우편함에 접근했다. B 씨는 우편함을 뒤지며 여성 혼자 거주하는 집을 찾았고 몰래 침입 후 20대 여성을 폭행하고 감금한 뒤 성폭행을 시도해 성폭력범죄의 처벌등에 관한 특례법상 특수강도 강간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되기도 했다.

현관 옆 유리창에 적힌 '1130'


주거침입은 '주거의 평온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항으로 침입자가 들어간 방법이나 신체 중 일부만 들어갔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주거의 평온과 안전을 해쳤다고 여겨지면 죄가 성립될 수도 있다.

이웅혁 건국대학교 경찰학과 교수는 "범죄 의도를 가지고 공동현관에 쓰인 비밀번호를 입력했을 때 목적이 있다면 처벌이 가능하다"라며 "건물구조에 따라 아파트 같은 경우는 공동현관부터 주거침입으로 인정되는 경우도 있다"라고 말했다.

무용지물이 된 공동현관 잠금장치.


현관 외부에 택배를 받을 수 있는 보관함을 설치하는 것으로 관련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취재진이 방문한 빌라 밀집 지역에서 세 건물 중 한 건물에는 비밀번호로 추정되는 숫자 낙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누가 적었는지 특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현재로서는 택배 기사나 음식 배달 기사가 비밀번호를 노출한다고 해도 이를 규제할 제도적인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나 열 수 있는 잠금장치 '우리 집은 안전한가요?'


주거시설의 1차 출입 통제시스템이 무너지면 개별 가정의 안전까지 위험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거주민이 현관문을 열었을 때 택배가 아닌 낯선 범죄자가 배달될 수 있는 상황도 일어날 수 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거주자의 안전과 배달업자의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진영상기획부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이메일: [email protected]
▶뉴스 홈페이지: http://talk.tf.co.kr/bbs/report/wr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