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이익 탐내다 의로움 망각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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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54편
순신의 공 가로챈 원균
탄핵 상소 빗발쳤지만
원균 탄핵 반대한 선조
견내량 철통 방어한 순신
또다시 차자올 전쟁 준비
충심의 이순신을 향해
의심과 불만 표출한 선조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꼽은 '2023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 '이익을 탐내어 의로움을 망각하다'란 뜻으로 출세와 권력을 좇는 사회 지도층의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이순신이 살아가던 엄중한 시대에 '견리망의'의 처신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은 원균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견리망의'의 늪에 빠진 인물은 누구일까.

정치인 중에서 이익을 탐하는 자가 많으면 나라가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원균은 세력이 있는 사람을 대하면 우대하고 아첨하지만, 그 사람의 세도가 막히면 배척하고 괄시했다. 애당초 원균은 이순신에게 붙어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과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도주한 죄에서 벗어나게 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순신이 공을 올릴 때마다 자신의 성과로 치장하기 바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적 포인트가 높은 왜적의 수급을 끌어모아 헌공하면서 조정으로부터 점수를 따는 데 몰두했다. 

윤두수·윤근수 형제를 비롯한 혈맥 카르텔과 서인의 세도가들은 그의 후원 세력이었다. 조정의 주요 인사들에게 "원균은 늘 왜적과 싸울 생각만 하고 있는 반면 이순신과 이억기는 신중하기만 하다"라는 가짜 여론을 확산시켰다. 원균은 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의 지시에도 잘 따르지 않았고,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는 일도 많았다. "100만명의 유민流民을 거느리고 삼도의 해왕 노릇을 한다"는 유언비어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런 원균은 충청도 병마사로 재직하면서도 여전히 견리망의를 버리지 못했다. 결국은 그를 고발하는 탄핵 상소가 빗발치면서 사헌부가 나서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1595년 을미년 8월 15일, 사헌부는 임금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충청병사 원균은 사람됨이 범람(평범)하고 탐욕·포악해 무리한 형벌과 잔혹한 일을 자행해 죽은 자와 원망하는 이가 많으니, 파직하고 용서하지 마소서."

그러자 선조는 "원균은 사람됨이 범람하지 않다. 이런 시기에 명장에게 해를 줘서는 아니된다"며 탄핵을 반대했다. 사헌부에서 다시 한번 탄핵을 주장하자 선조는 이렇게 반론을 폈다. "오늘날 장수로서는 원균이 으뜸이다.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가벼이 논계하여 그의 마음을 풀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윤허하지 않겠다."

일주일이 흐른 8월 22일. 새롭게 도체찰사에 오른 이원익은 삼남 각지를 순행하다 진주에 도착했다. 다음날 이원익을 만나 군사정보와 다양한 의견을 나눈 후 이순신은 배를 소비포에 정박시키고 이런 일기를 남겼다.  

"8월 23일 맑음. 체찰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호남순찰사는 헐뜯어 말하는 기색이 많으니, 한탄스럽다. 저녁에는 김응서와 함께 촉석루에 이르러 장병들이 죽은 곳을 바라봤다. 슬픔과 분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8월 25일. 이순신은 도체찰사 이원익의 일행을 배에 태워 거제도 일대의 섬들과 진지, 그리고 왜적과 싸울 만한 장소들을 직접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면서 하루 종일 의견을 나눴다. 판옥선과 거북선, 5000여명의 장졸을 두루 점검하고 둔전까지 시찰한 도체찰사 이원익을 비롯, 부체찰사 한효순 이하 종사관까지 이순신의 업무능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원익은 이순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침착하고 남의 말을 하지 않으며, 오로지 나라 걱정이 가득했다. 또 항상 계획적이고 꼼꼼한 사령관이다." 그의 충정 또한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일화도 있다. 도체찰사 일행이 한산도를 떠나기 직전, 이순신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조정을 대표해 이곳에 왕림하신 대감께 바라는 일이 있습니다. 호궤(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를 열어 성상께서 군사들을 두루 살피시고 있다는 점을 알게 해주심이 어떠할까요."

이원익 측이 "미리 준비한 바가 없은즉 어찌할 수 없어 매우 미안하오"라고 말하자, 이순신은 "대감이 허락해주신다면 소인이 마련할 터이니 염려하실 일은 없습니다"며 음식과 술을 준비했다. 「난중일기」에 나타난 이 일화의 기록은 아주 짧고 간단하다. "8월 26일 맑음, 저녁에 부사(김륵)와 만나 은밀히 이야기를 나눴다. 8월 27일 맑음, 군사 5480명에게 밥을 먹였다."

이원익이 떠날 때에 "당신을 대신할 만한 장수의 재목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순신은 이억기, 이순신李純信, 이운룡 등을 천거했다고 한다. 이원익은 왜 이런 질문을 던졌을까. 뜬금없이 던지지는 않았을 터다. 선조가 그동안 생각해온 '이순신의 파직'이 수면 위로 오르고 있음을 예고하는 장면이다. 이순신을 파직하려면 그를 대신할 인물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이원익에게도 모종의 지시를 내린 게 아닐까.

후일 이원익은 선조에게 이순신(긍정)과 원균(부정)의 인물평을 하는데, 이번에 이순신의 됨됨이를 제대로 파악하고 넌지시 귀띔을 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선조는 이미 원균을 점찍어 놓고 있었다.

을미년이 그럭저럭 지나가고 1596년 병신년이 왔다. 이순신은 여전히 견내량을 철통같이 지키며 또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제도 지역에 숨어있는 왜적 잔당을 소탕하면서 잡아들인 포로들로부터 풍신수길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공격해올 것이란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병선을 새로 만들고 군사훈련과 활쏘기, 왜적 동태파악, 군율확보, 둔전감독, 망궐례, 수륙군 제장과의 소통과 화살 지원 등이 그의 준비 내용이었다   

그 무렵, 명나라와 왜나라의 강화교섭은 어느 정도 진전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5월엔 왜군 제2군 주력부대가 철수했다. 6월 15일엔 풍신수길을 '일본 왕'으로 인정해주기로 한 명나라의 책봉 사절이 부산에서 출발했다. 동시에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의 제1군 주력부대도 철수했다.

선조는 엉뚱하게도 순신이 아닌 원균을 신뢰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의 체직 논의가 있었다. 이때 좌의정 김응남은 이순신과 원균이 모두 명장이라면서도 삼도수군통제사의 적임자로 원균을 추천했다. 그러자 선조는 이순신을 향해 의심과 불만을 표출했다. "이순신이 처음에는 힘써 싸웠으나, 그 뒤에는 성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세자가 무군사로 불렀을 때도 오지 않았다." 결국 선조는 원균을 승진시켜 전라병사로 임명했다. 

명분은 7월에 전라도에서 일어났던 이몽학의 난을 수습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순신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한 조치로 받아들여졌다. 공교롭게도 이때 전라도 의병장 김덕룡이 이몽학의 난에 억울하게 연루돼 옥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1594년 10월에 있었던 장문포 왜적 토벌작전에 선봉으로 나서기도 한 용장으로 이순신과는 호흡이 잘 맞았던 인물이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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